지난 해, 시계 보관함의 방 하나가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졌다. 떠난 건 모나코였고, 찾아온 것 역시 모나코였다. 맞다. 같은 모델을 굳이 또 들인 거다. 이별과 만남은 대략 4개월의 시차를 두고 이뤄졌다. 의도치 않게 ‘방출’이 아닌 ‘기변’이 되었지만 이 또한 익숙한 일이다. 벌써 네 번째 모나코. 이번에 찾아온 손님은 2024년 9월 출시된 모나코 크로노그래프 레이싱 그린 모델이다. 칼리버 11을 탑재한 복각 모나코를 새롭게 변주한 것으로, 샌드 블라스트 처리한 티타늄 케이스에 실버 선버스트 다이얼과 그린 서브 다이얼, 그리고 옐로 크로노그래프 세컨드 핸즈를 조합했다. 레이싱 워치답게 스트랩은 펀칭 처리한 그린 소가죽 스트랩을 매칭했는데, 스트랩 뒷면에 옐로 컬러 러버 소재를 덧대어 전형적인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테마를 구현했다. 이 옐로 러버 소재는 착용할 땐 보이지 않지만 시계를 벗어두면 꽤 멋진 감상 포인트가 된다.
어떤 시계인들 그렇지 않겠냐만 이 모델 역시 구매하기까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던 모델이다. 일단 티타늄 모델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가격이 너무 비쌌다. 지난 해 9월 출시 당시 1,364만 원의 가격표가 붙었는데, 올해 1월 브랜드 전체 가격을 인상하면서 기어이 1,400만 원을 넘겼다. 참고로 지난 해 구매한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38mm 모델이 현재 정가 기준으로 1,463만 원이다. 여러 시계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라면 다른 걸 사면 그만이지만 모나코의 경우에는 대체로 대체재가 없는 편이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모나코는 ‘어떤 걸 살까’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한 끝에, 이제부터 썰을 풀 여러 근거를 토대로 자신을 설득시키며, 겨우 지름의 계곡을 통과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자아가 쏟아내는 궤변에 100퍼센트 동의하진 않았지만 못이긴 척 수긍해줬다. 경험상 모나코 한정판은 꽤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지니까.
네 번째 모나코를 얘기하기 전에 일단 그동안 스쳐갔던 세 개의 모나코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특히 첫 번째 모나코는 소재와 컬러를 제외하면 네 번째 모나코와 완전히 똑같은 녀석이니 말이다. 같은 걸 왜 또 샀냐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모나코는 내가 구입한 첫 번째 스위스 시계다. 게다가 처음으로 구입한 새 제품이기도 했다. 모나코가 집에 도착했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자동차를 제외하면 난생 처음으로 수백 만 원짜리 물건을 구입했으니 기억이 안 날 수가 없다. 빈티지한 베이지 컬러 가죽 케이스에는 ‘HEUER’라는 붉은색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 안에는 짙은 청색 다이얼의 사각 시계가 빛나고 있었다. 그건 그때까지 내가 보았던 사각 형태의 물질 중에 가장 미학적으로 뛰어난 물건이었다. 적어도 모나코에 영혼을 빼앗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수많은 시계 중에 왜 하필 모나코였을까? 기계식 시계 입문자로서 ‘태그호이어’라는 브랜드에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입문용 아쿠아레이서를 선택하지 않고, 자금을 더 쏟아 부어 모나코를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당시 모터사이클에 심취했던 내 속도 지향의 삶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영화 <르망>에서 레이싱 슈트를 입은 스티브 맥퀸이 모나코를 착용한 모습은 내 욕망의 가속 페달을 밟는 이유로 충분했다. ‘이걸 착용하고 체리(당시 애마였던 레드 컬러 두카티 멀티스트라다의 애칭)와 함께 전국일주를 떠나야겠다’ 그런 상상과 망상 사이 어디쯤에 있는 꿈을 꾸며 모나코의 역사와 주요 모델을 정신없이 검색했다. 사각형의 유니크한 디자인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종류의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대개 ‘남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대중의 취향에서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된다. 평범한 직장인의 첫 시계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를 테면 대중성과 개성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사각 형태의 모나코는 그런 내게 아주 적당한 완충지대였다.
원래 마음에 들었던 건 크라운이 오른쪽에 있는 좀 더 정제된 형태의 칼리버 12 모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1969년 오리지널 모나코를 재현한 칼리버 11 모델로 마음이 기울었다. 모나코의 과거에 너무 심취했던 탓일까? 사각형 케이스만으로도 충분히 유니크했지만 왼쪽에 위치한 크라운, 과거 칼리버 11의 흔적이 그 맛을 보다 농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비록 뷰렌의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한 옛 칼리버 11과 전혀 다른, 셀리타 기반의 유사 엔진이지만 왼쪽에 배치된 크라운은 그 탄생의 역사를 공유하기에 충분했다. 뒤부아 데프라에서 제작한 크로노그래프 모듈도 그 시절의 협업 역사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며 셀프 최면도 걸었다. 무광 다이얼을 선호했던 당시의 취향도 칼리버 11 모델 선택에 한몫 했던 것 같다. 마치 오래된 청바지를 연상시키는 매트한 블루 다이얼, 오팔린 마감 처리한 실버 서브 다이얼, 레드 컬러 크로노그래프 세컨드 핸즈의 조합은 그 자체로 완벽한 빈티지였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수평 인덱스까지.
수년 동안 모나코 칼리버 11은 데일리 워치로 맹활약했다. (근육 손실이 찾아온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 베스파 PX125를 타고 다녔는데, 검증된 셀리타 기반의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올드스쿨 바이크의 진동에도 잘 견뎠고, 가끔 만났던 여름날의 폭우 속에서도 완벽한 방수 성능을 자랑했다. 헬맷을 쓰고 스티브 맥퀸을 흉내내며 포르쉐가 아닌 베스파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올리브 그린 컬러의 벨스타프 자켓과도 궁합이 좋았던 것 같다. 빛바랜 그린 컬러, 매트한 블루 다이얼, 그리고 레드 컬러의 조합이 꽤 근사했다. 블루 다이얼에 빛이 강하게 쏟아지면 마치 해변의 모래처럼 잠깐 반짝이다가, 빛이 물러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해졌다. 늘 칙칙하고 우울하다가 아주 잠깐 밝아진다는 점에서도 주인을썩 닮았다.
온갖 환경에서 데일리 워치로 구르면서 사각 스틸 케이스는 천천히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러그가 찍히고, 폴리싱된 표면에는 이런저런 스크래치가 생겼다. 그래도 툭 튀어나온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가 꽤 외부 충격을 방어해줬서 전반적으로 컨디션은 양호했다.단단했던 펀칭 소가죽 스트랩도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미세하게 갈라진 가죽의 결 사이로 진한 시간의 향이 흘렀다. 그렇게 시계는 계속 나이를 먹었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낡아갈수록 1969년 오리지널 모델에 조금씩 근접해가는 느낌이었다. 시계가 자기가 태어났던 시간을 향해 달려간다는 감각이랄까. 그 느린 역주행 레이싱을 관람하는 것이 마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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